풍경의 시공간 - 2. 사건들의 총체
세상은 사물들이 아닌 '사건'들의 총체이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로벨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의 저자, 로벨리는 세상은 서로의 관계 속에 존재하는 관점들의 총체와 같고 세상이 사건의 네트워크라고 생각하면 세상의 작동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리적인 세상이 사물로 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건'이란 세상에 발생한 절대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각각의 좌표계에 고정되어 어떤 고유의 값을 만든다. 나의 시공간에서만 계산되어지는 나만의 값이다.
그는 인간사회의 현상도 자연현상도 모두 사물이 아니라 사건들의 집합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은 사물이 아니라 사건들의 총체이다. 폭풍우도 사물이 아니라 돌발적인 사건들의 집합이다. 산 위의 구름도 사물이 아니다. 공기 중의 습기가 응결된 것을 바람이 산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파도도 사물이 아니라 물이 움직이는 것이고, 이 물은 언제나 다른 모양을 만든다. 가족도 사물이 아니라 관계와 사건, 느낌의 총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 당연히 사물이 아니다. 산 위에 걸린 구름처럼 음식, 정보, 빛, 언어를 비롯한 수많인 것들이 들어가고 나오는 복잡한 프로세스다. 사회적 관계의 네트워크 속에, 화학적 프로세스의 네트워크 속에, 자신과 비슷한 타인들과 교환한 감정의 네트워크 속에 있는 수많은 매듭들이 인간 안에 존재한다."
즉, 사회는 관계의 네트워크이고, 자연은 화학적 프로세스이고, 인간은 감정의 네트워크다. 모든 것은 총체이다.
풍경도 그렇다. 풍경도 사건과 경험의 총체이다. 장소성은 개인과 문화로 만들어지므로 이것은 관계과 감정의 네트워크이다. 풍경을 형성하는 날씨, 시간 등과 같은 요소들은 자연현상이라는 범주에 묶여 이것은 화학적 프로세스의 네트워크이다. 풍경을 상품화하는 관광과 풍경을 구상하는 사업은 기술과 사회라는 사회적 관계의 네트워크이다. 이렇게 풍경은 사건들의 총체이자 사건들의 네트워크인 것이다.
사물은 없다. 이것은 마치 테세우스의 역설처럼 들린다 (테세우스의 배는 시간이 지나 모든 부품들이 교체되었다. 이것은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인가?). 사물과 사건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것인지는 철학자에게 맡겨두고, 흐르지 않는 시간은 로벨리에게 맡겨두고, 나는 풍경의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우리는 몽블랑이라 부르는 바위들을 모아 하나의 실체로 범주화하고, 하나의 통합체로 간주한다. 세상에 선을 그어 부분들로 나누는데, 경계를 설정하여 세상을 근사적으로 조각낸다.
근사적으로 조각낸다는 의미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설명가능한 틀로 쪼개며 단순화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세상을 구분 지어 근사적으로 조각내는 이유는 로벨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자아를 형성하는 하나의 요소로, 우리 각자를 세상에 대한 '하나의 관점'으로 동일시하는 것이다. 세상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한결같고 안정적인 연속된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세상을 그룹화하고 분류한다. 세상과의 상호 작용이 더 잘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따뜻한 봄 날씨에 어떤 길에 벚꽃들이 만개한 것이 하나의 풍경으로 단순화된다. 이것은 좋은 풍경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그 '좋음'은 개별적 요소들이 함께 구성하는 것이며, 개별적인 요소들 (따뜻한 온도, 햇살, 길, 벚꽃, 만개, 벚꽃의 수)들이 상호작용한 결과이다. 일례로 벚꽃길의 풍경을 그리라고 시킨다면, 비가 오는 날씨를 그리지 않을 것이다. 벚꽃길이 만개하지 않은 모습도 그리지 않을 것이다. 벚꽃길은 날씨도, 일조량도 길이나 벚꽃나무 그 자체도, 꽃이 핀 정도도 아니다. 로벨리에 따르면 하나의 실체란, 그 모든 것의 상호작용을 모아 인간이 "하나의 실체"로 범주화하고 하나의 통합체로 간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풍경의 실체 찾기는 한 층 더 복잡하다. 문화라는 요소가 공간인지와 해석에 매우 깊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풍경'이라는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그 실체도 무수한 사건들의 구성이다. 만약 풍경을 단순히 특정한 자연현상은 문화적 요소로 해석해서 공간을 인지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풍경의 실체는 자연요소인가 인지와 해석인가? 뿐만 아니라 풍경이 단순히 자연적 현상이 그 실체라고 주장한다면, 그래서 일출과 일몰이라는 자연현상을 어떠한 진화적 이유에서 아름답게 인지하는 것이라면, 역사성을 띄고 있는 풍경은 설명이 어렵다. 역사성이란 과거를 포함하는 시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공간의 과거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이 풍경의 정체성을 만든다. 특별한 역사적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그곳은 풍경이 된 것이 아니냐고 반박한다면, 특별한 역사적 이야기란 무엇인가?라고 되묻고 싶다. 누구에게 특별하단 말인가? 한 소녀의 할머니가 가꾸던 정원은 그 소녀에게 가장 특별하며 할머니와 함께한 그 공간도 과거의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이 할머니 집 풍경의 정체성을 만든 것이다. 누가 특별함을 지정하는가? 다수의 국민이 감명 깊다고 생각하는 역사여야만 하는가? 그럼 공간설계가는 어떠한 근거로 공간의 정체성을 부여하는가? 다수가 동의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서 풍경의 실체를 찾아 어떤 사건들이 범주화된 것인지 산산조각 내는 것보다 풍경을 하나의 총합체 그 자체로 이해하는 편이 낫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좋다고 느껴지는 이 풍경이 역사, 색감, 온도, 날씨, 식물, 사회적 조건, 감정 상태, 같이 있는 사람 중 어떤 게 역할을 가장 많이 하고 있는지보다 그 모든 순간의 사건들의 네트워크이며 우리는 흐린 눈을 하고 그 네트워크 자체를 하나의 통합체로 간주하는 것이 세상을 이해하고, 풍경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더 쉬울 것이다.
따라서 로벨리의 말을 빌려 이해한 풍경은 "세상을 근사적으로 조각내어 만들어진 범주화된 총합체"라고 할 수 있다.